by 샘
백현진이 좋아지는 날이 오리라고는

 어어부 프로젝트를 들으며 내가 이 음반을 다시 들으면 내가 내가 아니라며 부르르 떨던 90년대만 하더라도 내가, 이 내가 백현진이 좋아지는 날이 오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백현진은 정말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내가 좋아할만한 부분이 단 하나도 없는 아티스트이자 뮤지션이'었'다. 그야말로 '돼지 멱따는 소리' 같은 목소리부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류의 되는대로 만든 '키치한' 스타일의 각종 작품들, 어린아이의 유치함과 덜 자란 어른과 자폐아 사이에서 늘상 갈피를 못잡는 듯한 행동이나 말투, 심지어는 치졸하지만 외모까지도 싫었다. 정말 죽는 날까지 내가 백현진 같은 스타일의 아티스트를 좋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지난해 나왔던 백현진의 [반성의 시간]을 들으며 더욱 이상야릇한 기분에 휩싸였었는지도 모르겠다. 중고등학교 시절, 저런 애를 좋아하기는 커녕 친구조차 될 수 없어! 학기초에 마음 속으로 점찍어놨던 바로 그 아이가 여름방학이 될 즈음에 어느새 마음 속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을 알아챘을 때의 당혹스러운 마음과 조금 닮은 기분이었달까. [반성의 시간]은 무척 날 것이었고 솔직했으며, 또 한편으로 무척 시적인 앨범이었다. 나이가 적은 사람보다는 나이가 조금 든 혹은 들어가고 있다 느끼는 사람들이 몸으로 맘으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앨범이었다. 볕이 따뜻한 오후에 등을 바닥에 붙이고 대자로 팔다리를 벌린 뒤 듣고 있으면, 위로 같기도 하고 책망 같기도 한 거대한 일렁임이 방 안을 가득차게 만드는 앨범이었다. 난 이제 백현진을 좋아한다. 적어도 [반성의 시간] 이후로는.

 지난 토요일, 별과 백현진의 공연이 있었다. 실은 백현진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친구에게 초대를 받아서 우연히 발걸음을 옮겼던 라이브였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혼자였고, 공연장에는 한 명에 5병씩 가져오라고 했던 술병 숫자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복작거렸다. 그런 분위기에선 무엇을 보건 듣건 모두 특별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그날은 그 특별지수파장이 평소보다 몇 배는 높았다. 새벽부터 나와 일을 했던 날이었고, 그 어느 때보다 외롭고 지쳐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 비가 잔뜩 새서 질척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던 것도 한 몫 했을거다. 그날, 그 어두운 언제나의 공연장 안에서 나는 참 많은 생각을 했고 별스럽지도 않은 갖은 기억들을 끄집어 냈다 도로 집어 넣었다 다시 끄집어 내기를 반복했다. 

 그날의 기억들 중, <학수 고대했던 날>. 피아노엔 정재일, 기타엔 방준석. 



by | 2009/11/03 01:49 | daily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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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ryuna at 2009/11/06 00:35
2005년 봄에 아직 출시는 안된 이 앨범의 아홉곡들을 지인한테서 받아 들었을 때, 나 역시 어어부고 뭐고 너무 우리했던 백현진한테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대체 앨범은 언제 나오나 하고 기다렸는데 그새 앨범이 나왔구나!

계단에 앉아서 당신을 기다렸던
97년 초여름의 빛나던 시간
딸린으로 가는 배의 2층 침대에서
당신에 관한 노래를 부르다가 울었네

이런 가사에도 심장이 절절해지던, 밤마다 틀어놓고 배 안에 혼자 누워 둥둥 흐르는 것 같은 기분으로 누워 들었던 백현진을 듣던 밤이 떠오른다. 공연봤다니 부럽구나
Commented by at 2009/11/07 01:00
으 노랫말... '본격성인가요'라는 말 딱이야 정말. 생활문학이라구.

정말 우리하던 백현진이 [반성의 시간] 데리고 나왔을 때도 깜짝이고 좋았지만
라이브도 참 좋아서 깜짝 놀랐었어. 앨범엔 담기지 못한 금방이라도 지금 앉은 발아래 땅이 무너질듯한 에너지의 분출. 이날 공연도 참 좋았어. 언젠간 윤아와도 함께 볼 수 있길.

참, 이날 멘트 중에서 기억나는 한가지.
'웃을 수 있을때 많이 웃어두세요. 점점 못 웃을 일들이 많아지니까'였던가.
뜨끔했지.

Commented by 진진 at 2009/11/06 02:08
아 좋다
무언가든 누구든 문득 좋아지게 되는 거
어떻게든 변화가 있다는 건 재미있는 거 같으다
Commented by at 2009/11/07 01:01
응. 어떻게 변하냐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엉엉 우느니
변해가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나와 운명처럼 만날 우연을 기다려보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 우연 중에 좋은 순간들이 더 많았으면 하고 욕심도 ;)
Commented by 둥구 at 2009/11/09 19:59
어어부 3집은 진린데요?
페스티벌에서 <종점보관소> 들으면 아주 쩌는데요?

집에 돌아왔더니 엄마가 성전환 수술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싸구려 남성용 스킨을 바르고 카이젤 수염에 시가를 물고 있었는데요?
난 멈칫거리다 엄마의 선택을 존중키로 하며 뺨에 키스했는데요?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at 2009/11/12 01:09
개드립 쩌네요 진짜....
그래요 뭐 병아리 감별사 김씨의 좁쌀 로맨스 운운하던 황신혜 밴드보단 우위로 쳐드리죠. 이야 의외로 어어부 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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